‘Cicli Colnago’

밀라노 캄비아고의 작은 공방에서 시작된 거대한 역사

 

 

 

 

 

 

 

 

 

 

콜나고는 에르네스토 콜나고가 1952년 설립한 이탈리아 자전거 브랜드로 자전거 역사에서 큰 축을 차지하고 있는 혁신적인 기업입니다. “자전거를 만들기 위해 태어났다” 고 말했던 에르네스토 콜나고는 10대 시절 글로리아 바이시클에서의 견습생 근무, 사이클링 팀의 선수로도 활동하며 사이클링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후 자신의 공방을 설립하고 사이클 선수들을 위한 자전거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뛰어난 그의 프레임 제조 기술은 성능좋은 자전거를 완성시켰고, 그의 명성은 점차 커져나가 1963년에는 MOLTENI 팀 전속 미캐닉으로 활동하며 전설적인 선수 에디 멕스의 자전거를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1960년 루이지 아리엔티 선수가 콜나고 자전거로 로마 올림픽 금메달을 따게되며 콜나고는 성공가도를 걷게됩니다. 10년 뒤, 1970년 에는 미켈레 단첼리 선수가 밀란-산레모 레이스에서 감격적인 우승을 거두었고 이때부터 승리를 상징하는 클로버 모양 로고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 로고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최고의 선수 에디 멕스와 최고의 미캐닉이자 개발자 에르네스토 콜나고의 인연은 이후에도 이어지며, 커스텀 프레임을 통한 수 많은 우승과 월드 아워 레코드 기록을 쏟아내게 됩니다.

콜나고는 스틸에서 부터 티타늄, 알루미늄, 카본 등 다양한 소재를 자전거 제조에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카본 기술 개발을 위해 페라리와 협업을 진행하며 기술적인 진보를 이루어 내게 됩니다.

1940년

1940년 아홉 살 때의 에르네스토 콜나고

1950년

1950년, 에르네스토 콜나고의 코파 칼디롤라 우승 뒤 가족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 중앙의 모자 쓴 남자가 에르네스토의 아버지 안토니오 콜나고, 안고있는 아기는 에르네스토의 동생 파올로 이다.

1952년

선수로 활동하던 에르네스토는 레이스에서 사고로 다리 골절상을 입고 선수생활을 그만둔 뒤, 좁은 7평 남짓한 공간에 ‘시클리 콜나고(Cicli Colnago)’ 라는 이름을 붙인 공방을 오픈한다. 그가 만든 자전거는 ‘트릭을 쓰지 않은 기술적으로 뛰어난 자전거’로 인정받 게 되었는데, 13세 때 부터 글로리아 바이시클의 용접공으로 일하며 쌓은 기 술력이 토대가 되었다. 조르지오 알바니, 파우스토 콥피 같은 전설적인 선수 들의 휠 빌딩을 시작으로 1954년에는 프로 팀 전속 미캐닉으로 활동하게 된다.

1955년

콜나고의 자전거를 타고 있던 피오렌조 마니는 1955년 지로 디탈리아 에서 낙차로 쇄골 골절상을 당한다. 산악 스테이지가 계속 이어지는 시점에 스테이지15 개인독주와 마주한 마니. 핸들바를 당길 수 없던 그를 위해 에르네스토는 라텍스 튜브의 한쪽을 핸들바에 묶고 마니의 입에 다른 한쪽을 물게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결국 스테이지3위를 기록하였으며, 피오렌조 마니는 최종 말리아 로자의 주인공이 된다.

1957년

에르네스토 콜나고는 1957년 레오-클로로돈트 팀의 메인 미캐닉 이었다.

선수들은 콜나고가 만든 자전거를 타고는 있었지만 후원받는 자전거의 로고를 붙였어야 했다.

그 해 레오-클로로돈트 팀의 가스토네 넨치니 선수는 콜나고의 자전거를 타고 지로에 출전, 후반부의 산악 구간에서 선전하며 지로 종합우승과 종합 산악왕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다.

팀카에서 서있는 사람이 에르네스토 콜나고.

1960년

사진은 동생 파올로 콜나고와 함께 시클리 콜나고 공방에서 트랙 바이크를 조립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해 말, 이탈리아 트랙 국가대표팀의 루이지 아리엔티는 콜나고의 트랙 바이크를 타고 로마 올림픽 팀 퍼슛 종목에 출전, 금메달을 차지하게 된다.

이 때 부터, 콜나고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61년

필코팀 미캐닉 재직 시절, 작은 파우스토 콥피 라는 의미에 COPPINO(콥피노) 라는 별명을 가진 귀도 카를레시의 휠을 교체해준 후 밀어주고 있다.

그 해 귀도 카를레시는 뚜르 드 프랑스에서 두 번의 스테이지를 우승한다.

뒤따르는 사람은 피오렌초 마니

1966년

1966년 지로 디탈리아 에서 몰테니 팀의 쟌니 모타 선수는 후반부의 산악구간 중 두 개의 스테이지를 우승하며 24세의 나이에 말리아 로자를 입고 종합 우승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그의 자전거에는 보테키아 로고가 붙어있지만 실상은 콜나고 자전거였다.

에르네스토 콜나고는 1968년 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자전거를 팀에 후원하기 시작한다.

1970년

17년 동안 이탈리아인의 우승이 없던 밀란-산레모 레이스에서 몰테니 팀의 미켈레 단첼리 선수는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한다.

꽃의 도시 산레모에서 꽃 으로 둘러싸인 승리자를 본 에르네스토는 자신의 자전거 로고를 (Asso di Fiori : 꽃의 에이스, 에이스 오브 클럽) 으로 정하게 된다. 서포트 차량에 자전거를 들고 서있는 사람이 에르네스토 콜나고

1972년

사이클링의 전설 에디 멕스는 1972년 멕시코 시티에서 월드 아워 레코드에 도전한다. 에르네스토 콜나고는 그를 위해 특별한 자전거를 제작했는데 스틸 프레임 임에도 불구하고 무게는 5.9kg에 불과했다. 생산하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200시간.

에디 멕스는 한 시간에 49.451km 를 달리며 월드 아워 레코드를 갱신, “나의 라이딩 중에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1974년

드디어 콜나고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전거로 한 팀을 후원하게 된다.

SCIC 팀은 가구회사의 메인스폰을 받던 팀으로 에르네스토는 거의 10 년 동안 이 팀의 후원을 유지한다.

제일 좌측이 콜나고이며, 그 옆이 기비 바론첼리, 엔리코 파올리니, 그리고 프란코 비토시 이다. (제일 우측은 미상)

에디 멕스의 월드 아워 레코드

전설과 전설이 만나 새로운 기록을 세우다.
에디 멕스는 거듭하여 자전거의 개선을제안했고,
에르네스토는 그의 요구에 응하여 다양한 경량화 방법을 찾아냈다.

1982년

당시 콜나고의 후원을 받던 델 통고 팀에는 이탈리아의 영웅 주세페 사로니가 있었다. 그는 1979, 83년 두 번의 지로 디탈리아 종합우승을 기록하였고 1982년 영국 굿우드 에서 열린 월드 챔피언십 에서는 월드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 .

사로니는 콜나고가 개발한 별모양 튜브의 ‘MASTER’ 자전거를 탔으며, 잠시동안 그의 우승을 기념하며 사로니 한정판 모델도 생산하게 된다.

사로니는 현재 콜나고를 타고있는 UAE-에미리트 팀의 감독이다.

1983년

1983년 지로 디탈리아 종합우승을 차지한 주세페 사로니와 기념촬영을 가진 에르네스토 콜나고

1986년

소재에 대한 콜나고의 새로운 시도는 끊임이 없었다.

월드챔피언 사로니를 위해서도 더 좋은 자전거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그는 카본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엔초 페라리를 찾아간다.

두 사람의 만남, 아니 이탈리아 최고의 브랜드 두 곳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 예술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내가 원하는건 아름다운것 뿐입니다. 그래서 페라리의 정수를 원하는 겁니다”

그렇게 콜나고의 ‘CONCEPT’ 프로젝트는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진 좌측부터 엔초 페라리, 주세페 사로니, 에르네스토 콜나고, 반니 브람빌라

1990년대

마페이 팀과의 만남은 사이클링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콜라보레이션으로 기록된다.

이탈리아 챔피언십, 프레챠 왈로네, 리에쥬 바스토뉴 리에쥬, 월드 아워 레코드, 파리 루베 등 모든 레이스를 휩쓴 90년대의 주역이었다.

2000년대

2000년대에 들어서서도 수 많은 프로팀의 후원이 이어진다.

팅코프, 비박스 부이아그 텔레콤, 유럽카 등이었으며, 2011년 유럽카의 토마스 부클러는 뚜르 드 프랑스에서 9~18스테이지를 옐로 저지를 입고 달리게 된다.

2017년

2017년 새롭게 창단된 UAE-에미리트 팀을 후원하게 되는 콜나고.

여기에는 기존 람프레팀 감독이던 주세페 사로니와 에르네스토 콜나고의 친분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팀은 창단 첫 해 19승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알렉산터 크리스토브, 파비오 아루, 벤 스위프트 등 새로운 스타 선수를 영입하며 2018년의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